사랑에 대한 한 정의 –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을 2015년에 극장에서 보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아래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난 직후 인스타그램에 쓴 짧은 소감이다.
#이터널선샤인 을 극장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랑은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과거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상처도 함께 기억해내는 것이다.
사랑의 상처를 겪어본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진실된 지침서. (Instagram)
(아래 글엔 스포일러가 될만한 글이 많습니다. 아직 안보신 분들은 읽지 마시길..)
몇 가지 줄거리에서 정리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영화가 시작된 후 갑자기 충동적으로 몬탁 역으로 달려간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만난 것은 헤어진 이후일까 아니면 첫 만남일까? 사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맨 처음 만난 시점은 분명하다. 조엘이 아직 나오미와 살고 있는 시점 혹은 헤어진 직후인 시점에 몬탁 해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간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거기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적극성에 겁이 나 도망쳤다. 그 뒤 이삼년 혹은 몇해가 지난 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탁 해변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기억하고 있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나는 이 만남이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무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이 진정한 마지막이길 바라지만 꺼름칙한 부분은 몬탁 해변에서 돌아와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집으로 가기 이전에 잠시 자기 집에 들른 때 패트릭이 나타나 조엘에게 괜찮느냐고 묻는 장면이다. 이 장면 때문에 몬탁 해변에서의 재회로부터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이 대체 몇 번 반복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열차에서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우리 만난 적 있죠?"라고 질문하는 것이 딱 한 번 뿐이었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사랑과 실연의 상처는 사랑으로부터 누리는 행복의 크기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차에서 클레멘타인이 유명한 미국 민요를 읊조릴 때 조엘이 그 민요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열차 안 만남에서 이미 조엘은 기억이 한번 삭제된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라쿠나 사 직원들이 조엘의 집을 처음 방문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기억 삭제 전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열차 안에서 만난 경험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시간대 순으로 흘러가지 않아서 여러 해석이 가능할 듯.)
기억이 삭제된 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서로를 대하는 그 둘의 모습에서 이미 지워졌지만 앞으로 겪게될 서로에게 지울 상처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사랑이 주는 행복과 고통이 똑같은 무게라 할지라도 사랑을 선택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이며 상대에 대해 너그럽기 때문일 것이다. 패트릭이 상반되는 역할을 맡았다. 패트릭의 사랑은 오로지 자기충족적인 것 뿐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적막하거나 지루한 것이 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행복한 순간을 다시 누리기로 하였다.
나는 미셸 공드리 감독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렇게 우연히 만나기 위해선 운명의 여신의 도움을 받아야할 것이고, 현실적으로 사랑의 고통을 이미 겪은 사람들은 새 사랑을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결합하는 것에는 그리고 두번째 사랑을 가꾸어가면서 좀더 나은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기 위해서는 기억 삭제가 필수적인 것이다. 감독은 조엘이 자기 머리 속에서 지워지는 기억들을 되새길 때 서로 상처주는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기억을 많이 보여준다. 그래서 난 이영화가 따뜻한 동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으로 돌아가보면, 사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며 결정적으로 조엘은 소심하다. 하지만 조엘은 자기 기억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실제로는 몬탁 해변의 집에서 겁이나 도망쳤지만 상상 속에서는 되돌아와 클레멘타인을 만나는 용기를 낸다. 또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경험을 통해서 마지막 장면의 용기까지 생겼다. 즉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사랑을 되새기는 경험으로서만 우린 조금씩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며 사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완벽한 조화가 아닐지라도 그것은 행복이며 다만 비현실적이라는 점만이 문제일 것이다.
내게 영화의 감동적인 장면은 이렇다. 결국 기억은 지워질 것이고 서로가 남남이 될 수밖에 없다. 절망하는 조엘에게 기억 속 클레멘타인이 말한다. "어쩔 수 없다면 이 순간을 즐기자. (Enjoy it.)" 결과는 운명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집중해야 한다.
또 마지막 장면. 서로가 상대에 대해 생각하는 적나라한 싫은 점을 듣고 둘다 포기하려는 순간, 이번엔 클레멘타인이 아니라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잡으며 말한다. "괜찮다. (It's OK.)" 앞으로 또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 보이지만(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사랑해보고 싶다는 그 희망이 난 좋았다. 결국 이 순간이 아니면 행복은 행복이 아니며 단지 추억일 뿐일지도 모른다.
난 오늘 클레멘타인의 붉은 머리결, 해변 풍경, 얼어붙은 찰스강에 드러누운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시신경을 아름다움으로 채웠다. 내 삶의 사랑은 어찌 못하지만 이 영화의 사랑은 진정 사랑한다.
2004년 10월에 쓴 아래 짧은 소감을 찾아보니 살아온 경험이 한 영화를 어떻게 완전히 다르게 보게 만드는지도 알 수 있는 것 같다.
2015.11.08재 CGV
첫 감상문: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200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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