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고뇌하는 영웅이여 :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Night Rises, 2012)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개봉한 19일 지하 도로에서 배트맨이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과 그 웅장한 음악에 가슴이 쿵쾅거린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경찰 군중 속에서 배트맨이 등장할 때에는 비장감마저 느껴졌었다.
이제 영화를 본 직후 들떴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지금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상기해본다.
1. 비틀린 방법으로 선의를 이루려는 영웅의 탄생 – 배트맨 비긴즈
시리즈 1편에서 브루스 웨인은 어둠에 대한 공포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고담시를 멸망시키려는 그림자 연맹에 맞서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자기가 가졌던 어둠에 대한 공포를 악당들에게 돌려줌으로써 가능했다. 어찌보면 오로지 선하거나 합리적인 영웅이라기 보다는 옳지 않고 왜곡된 방법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레이첼이 브루스 웨인에게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범죄자들은 이제 너의 진짜 얼굴(배트맨)을 두려워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 사라졌던 그 사람은 아직 안 돌아왔어. 아직 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언젠가 고담 시에 배트맨이 필요없어질 때."
2. 절망 속에서도 정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다 – 다크 나이트
2편 "다크 나이트"에서는 본격적으로 배트맨이 추구하는 이상, 배트맨이 더이상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조커라는 막강 악당을 만나 끝없는 패배를 겪고 또 스스로 자초하여 사랑하는 레이켈과 하비 덴트 검사까지 잃고 만다.
그 처절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선하지 않은 일을 저지른다. 즉 고든 국장에게 배트맨을 살인자로 지목하여 하비 덴트를 가짜 영웅으로 발표하라고 시킨다. 그리하여 배트맨은 악당들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은 역설적인 영웅 다크 나이트가 된다.
이 때 정의에 대한 배트맨의 욕망은 갈기갈기 찢겨졌을 것이며, 레이첼을 잃은 슬픔은 지옥 같았을 것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마치 신파처럼 펼쳐지는 이러한 비극적 정조는 나로 하여금 배트맨에게 심하게 감정 이입되게 만들었다.
3.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아닌 The Batman Rises
3편 어둠 속에 잠적했던 배트맨이 돌아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는 더이상 다크 나이트는 없었다. 즉 "배트맨 비긴즈"로부터 시작해서 "다크 나이트"까지 이어진 질문과 정서에 이어지는 결론 또는 감상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의문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은 더이상 공포를 무기로 악당과 싸우지 않으며 오히려 선한(?) 경찰들과 함께 뭉쳐서 악당들과 싸운다.
여기엔 새로운 모습의 배트맨(군중 속의 일부인 배트맨)을 보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지만, 이것은 전작에서 마음을 뺏겼던 고뇌하는 모습의 다크 나이트와는 다른 한층 밝은 배트맨이다.
베인이 일으키는 폭동과 사회심리학적 신념은 새롭고 탁월한 면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탈리아 알굴이 등장할 때 그저그런 블록버스터류처럼 되고 말았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의 배트맨은 군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홀로 선 고독자의 모습을 버린다. 또한 사실 마지막 동상 제막식을 통해 하비 덴트에 버금가는 가짜 영웅의 모습으로 대중과 진정으로 함께 하지는 않는다.
단언적으로 "다크 나이트"에서의 배트맨은 오해를 자초하여 우리와 정서적 동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은 스스로 영웅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더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저 위의 누군가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하비 덴트 법이 아니라 더 억압적인 배트맨 법이 제정될 지도 모른다.)
과연 이렇게 해서 그저 거짓된 상징만으로 배트맨이 고뇌했던 '배트맨이 필요 없는 정의로운 세상'은 진정으로 이룩된 것일까?
4. 굿바이 배트맨, 웰컴 브루스
개인적 면에서 브루스 웨인은 구덩이에서 탈출할 때 (덜 절실하게 연출된 점은 있지만) 죽을까봐 겁을 먹음으로써,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극대화함으로써 삶을 쟁취한다. 즉 배트맨으로서의 비현실성(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버리고 현실적인 브루스 웨인으로 돌아오게(죽음을 두려워함으로써) 된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깨닫는다. 사랑이나 정의를 얻고자 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가장 인간적일 때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을. (물론 이 깨달음이 악당들과의 싸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한계가 있다)
5. 떨어지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와 함께 바라볼 때 진정한 재미와 감동을 느끼는 것이 맞다. 마지막 엔딩이 올라갈 때 나도 애정어린 마음으로 다른 관객들과 함께 박수를 보냈으며, 이 멋진 시리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크게 아쉬웠다.
드디어 브루스 웨인이 삶과 사랑을 찾은 것 만으로도 참으로 기쁜 일이다. 팬으로서 이 영화가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알프레드가 원했던 것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내게 다크 나이트 3부작은 영화든 현실세계든 절망의 극복이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심연까지 떨어짐으로써 새로 일어설 힘이 생긴다는 것과, 그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해주었다.
덧붙여. 소소한 것들.
- 셀리나 카일이야 말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유일하게 볼 수있는 덜 극단적이면서 다면적인 인물이다. 전형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다른 등장인물과 대비되어서 셀리나 카일은 가장 인간다웠다. 또한 브루스, 배트맨과의 두 번의 키스 모두 셀리나 카일에 의해 이뤄졌으며 영화 내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 미란다 테이트와의 키스도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이뤄져 무언지 모르게 와닿지 않았다. 코믹스를 보면 탈리아 알굴이 배트맨의 아기를 낳는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영화 3부작 내에서 유일하게 미란다 테이트와 브루스가 정사를 갖는다. 배드신에서 브루스 웨인이 탈리아 알굴의 등에 난 성처를 만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그림자 연맹의 단원이 되려면 범죄자를 처단한 후 불로 달군 인두로 몸에 표식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탈리아 알굴이 그 소속이었음을 암시하는 장치다.
- 베인은 계급 투쟁을 부추기는 테러리스트 같기는 하지만 잘 묘사한 것은 아니다. 경기장에서 고담시를 여러분께 돌려드리겠다고 했지만 또한 핵폭탄이 터질 지도 모른다고 협박했지 않는가? 또 하비 덴트 법이 결국 위선이었다는 폭로로부터 바로 가진 자들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 브루스 웨인이 블레이크에게 “평범한 사람들도 배트맨이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할 때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자경단 무리를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기 전에 읽었던 배트맨 코믹스와 영화에 대한 시리즈 글 중에 하나이며, 영화의 소소한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 배트맨을 ‘박살낸’ 유일한 악당은 누구?
- 괜찮게 읽은 리뷰. : 다크 나이트 라이즈 – 이것은 완벽한 엔딩이다 /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것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대한 위즈의 이전 글.
- 고독한 영웅의 탄생 : 배트맨 비긴즈 (Batman Begins, 2005)
- 악당이 되어 버린 영웅 :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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