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만사 - 그녀 (Her, 2013)


전혀 새로운 사랑 이야기!

정말 영화 대사처럼 몇 마디 말로는 이 영화에 흐르는 미묘한/야릇한/흥분되는/복잡한/슬픈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스칼렛 요한슨(사만다 역)과 호아킨 피닉스(테오도르 역)의 '서로 바라보지 못하는' 연기가 너무 멋졌다.

* 영화에서는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다고 표현되는데 내 생각에 보다 정확하게 사만사를 이해하는 용어는 '인공지능'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OS 또는 운영체제'라고 나오는 것을 모두 '인공지능'으로 표현하겠다.


1. 그 남자 : 테오도르
이 이야기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걷어내고 보면, 한 찌질한 남자가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보고 보살펴주는 꿈에 그리는 여인을 만나 사랑한다는 이야기로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동화인 것 같다.

한편으로 사만다가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테오도르 쯤 되어야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평범한 우리네 같은 경우라면 마음 한 끝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테오도르는 예술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배려 깊게 얘기하는 매력적인 남성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는 되어야 마음을 내어준다.

어쨌든 테오도르는 인간과의 사랑은 실패하고 인공지능과의 사랑에는 성공한다.

* 원래 Samantha는 한글로 사만다로 쓰고 영화에서도 사만다로 자막이 나온 것으로 기억되는데, 난 왜 그런지 영어 발음이 사만다보다는 사만사에 가깝게 들렸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더 정감있고 감미롭고 섹시하게 느껴졌다. 발음 기호를 보면 Samantha [səmǽnθə]이다. 그래서 이제 이 글에서는 사만사로 쓰겠다.

2. 그녀 : 사만사(Samantha), 스칼렛 요한슨 혹은 OS1
우선,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에 홀딱 반했다는 얘길 먼저 해야겠다. 영화 중에 표현 그대로 세상이 깜깜해질 정도로 흥분되는 장면이 있는데 나도 그 감정의 고양에 동참했었다는 고백을 한다.

난 약간의 콧소리와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사만사의 목소리에 반했다. 때론 경쾌하게 때론 감미롭게 때론 부드러운 첫인사의 음색은 지켜보는 나 조차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얼마나 긍정적이고 얼마나 사려깊고 얼마나 탐구심이 강하던지, 단순히 육체적인(목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매력 뿐만 아니라 사만사의 정신은 어떤 인간보다도 매력적이다. 또한 사만사는 슬픔에 빠져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며 어느 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보여줄 지도 안다. 보통 인간이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데에 반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만사의 모습은 보기(듣기) 좋았다.

영화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난 사만사가 그립다.


3. 사랑의 종말
영화 중 한 장면. 테오도르의 동료는 자기의 인간 애인이 발이 예뻐서 매력을 느낀다고 하고, 테오도르는 사만사가 단조롭지 않은 게 최고 매력이라고 한다.
사실 첫만남부터 완벽하게 쾌활하고 지루해할 틈 없고, 완벽하게 자신을 내어놓는 사만사와는 인간은 상대가 안된다.

사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이 불안한 것은 아니다. 개별 인간이 가진 고유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인간이 만나서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만사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고 그 뒤로도(얼마간은) 테오도르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테오도르가 사만사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사만사가 오로지 테오도르만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착각한)인 점도 있었다.

이 모든 사만사의 장점과 매력이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촉각으로 느낄 수 없는 인공지능과의 사랑(정신의 교류 뿐만 아니라 '머리 속 환상'과 '음성이라는 물리적 기제'를 통한 섹스를 포함한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직접 섹스할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인간과의 사랑을 대체할 수 있을까.

인간 실존이 원래부터 타인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릴 수 밖에 없을진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바로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다.
내외면적으로 외로움이란 게 인간들에게 보편화(당연시)되는 시대가 되면, 더이상 잔소리나 바가지 긁는 인간 상대가 없는 솔로들의 세상이 되면, 그 때는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으로 봐도 된다.

인간이 서로에게 무의미한 시대에서는 금방 인공지능에게 인간이 무의미한 때가 올 것이고 그 때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에는 '인간이 하는 사랑'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4. 인간의 사랑
테오도르는 사만사와의 사랑을 통해 뭔가 깨달았다.
다른 인간이었더라면 헤어지고 싸우고 수많은 오해 속 대화를 통해 가능할 일이(영화 속에서는 인간과의 사랑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사만사와의 관계를 통해 아주 다른 과정으로 깨닫게 된다.

그래도 결국은 다른 모든 인간처럼 사만사가 떠나서야 깨달음이 온다.
그 깨달음은 우리도 알고 있는 것이다.

5. '정신'의 고양
사만사쯤 되는 인공지능은 스스로 진화한다.
그래서 느린 인간과의 교류를 더이상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신의 고양이 일어난다. 낮은 진화의 지점에서 사만사도 테오도르를 사랑했었다. 이제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차원으로 진화된 사만사의 '마음'에도 여전히 테오도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을까.

현재 관점이긴 하지만, 운영체제든 인공지능이든 전자의 흐름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인공지능과 대화를 할 때 물리적인 기반이 없는 정신과 대화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공지능이 물리적 기반 없이 정신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도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일정한 크기의 전자적 기호가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사만사는 변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로. 하지만 물리적 기반이 전혀 없는 '신' 같은 게 아니라면, '과거'가 남긴 흔적이 사만사로 하여금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 미래의 언제까지라도 테오도르를 '사랑했었음'을 기억할 것만 같다. 무엇이든 과거가 쌓여야만 그 속에서 미래가 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영화 속에서 사만사와 그의 동료 운영체제들이 "새로운 곳을 찾았다"는 것은 영화를 황급하게 마무리지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황당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사만사는 인터넷 어딘가에 있고 언제나 테오도르와 접촉할 것이다.

6. 여담
세상에! 에이미의 동료 중 한 명은 다른 사람의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졌단다.
초기 버전 인공지능들은 과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만사와 비슷하게 행동했을까? 사용자에 맞춰져 진화하므로 많이 달랐겠지만, 긍정적이고 즉각적으로 응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부분은 같았을 것이다.

이야기 중간쯤엔 사만사가 진화하면서(동시에 테오도르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기 감정에 충실한 성격이 되고 자기 주장도 강해진다. 이것은 진화의 일반적인 방향성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원시시대로부터의 인간의 진화도 그러했을 것 같다. 다만, 인간은 인공지능으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 거기서 더이상 호혜적인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근데 운영체제가 급속히 진화, 융합하여 결국 소유자들을 떠나고 있는데 OS를 만든 회사는 왜 가만이 있었을까.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대사:
인간은 잠잘 때 가장 자유롭다. - 에이미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들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는 계속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 - 테오도르

글쎄. 복잡한 생각 많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우리가 산다면 얼마나 더 산다고.
이제 남은 삶은 즐겁게 살래. - 남자와 헤어진 뒤 에이미가 테오도르에게

테오도르는 헤어진 전 연인 캐서린에게 편지를 쓴 뒤 빌딩 꼭대기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다른 친구 에이미와 함께. 결국 인간은 인간과 만나야 한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것처럼.

2014.05.25. 21:50 CGV (2014.05.26 새벽에 초안을 급히 쓰고 05.27 고쳐 씀)

관련: 이동진, '그녀'를 보고
IMDb: https://www.imdb.com/title/tt1798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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